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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역 '임시역사'는 어떻게 레전드가 되었나

천안삼거리

by 드파랑 2022. 11. 24.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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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역 임시역사 개관 19주년 ①] 물거품 된 민자역사의 흔적, 임시역사  |

 

지금 천안역이 실은 임시역사이고, 그 상태로 19년을 버티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그리고 원래 천안역에 거대한 민자역사가 들어설 계획이었다는 사실도 아시나요?

지난달 24일, 천안역 임시역사가 개관한 지 19주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임시역사를 세울 당시만 해도 지역에서는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민자역사라는 꿈에 부풀어 있었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그 꿈은 끝내 물거품이 되었답니다. 그 뒤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어영부영 시간만 흘려보내는 사이 3년 쓰고 허물어질 줄 알았던 임시역사로 한 세대를 보내게 되었고, 이제는 현재 역사가 임시로 지어진 줄 모르는 사람도 많아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현 상황에 불편을 느끼고 있지만, 새로 짓겠다던 건물의 첫 삽질은 기약 없이 늦어지고 임시역사가 20년을 맞이하는 건 기정사실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천안역이 왜 긴 시간 동안 임시역사로 머물러야 했고, 천안역은 지금 어떤 처지에 있으며, 미래에 어떻게 변화할 것인지를 세 차례에 걸쳐 살펴보려고 합니다.


구 역사는 왜 헐려야만 했는가

경제 성장으로 철도 이용객 수 증가와 생활 수준 향상으로 철도 시설을 향상시킬 필요성은 절실했지만, 일제 강점기에 지은 철도를 운영하는 것조차 버거웠던 철도청은 모든 역사를 새 건물로 바꿀 돈이 없었다.

천안역 또한 마찬가지였다. 임시역사 전에 동부광장 택시 승강장과 주차장으로 쓰이는 자리에 1986년부터 2003년까지 구역사가 있었다. 내가 어렸을 때 이 역사를 몇 번 이용한 적이 있다. 기억과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을 간추려서 이야기하면 천안역은 좁고 위험했다. 한눈에 봐도 후줄근한 구역사는 겉으로는 2층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단층이었고, 상업시설 없는 순수한 맞이방 넓이는 현재 동부역만했다. 역과 승강장을 잇는 통로는 지하도와 철로 위 건널목이었다.

일반열차만 다녔던 시절에는 이런 구조가 (불편은 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수도권 전철 1호선 천안역 연장 개통을 앞둔 상황에서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열차 정차 횟수와 역 이용객 수는 늘어나리라 예상했었고, 수도권 전철 개통 첫해인 2005년에 천안역 이용객 수는 전년 대비 두 배 늘면서 현실이 되었다. 철도와 이용객 동선을 명확히 분리하지 않으면 사고는 일상이 될 것이 뻔했다.

그리고 역사에서 별도로 개표 절차가 없는 일반열차와 달리 수도권 전철은 교통카드를 찍고 타야 하므로 별도의 개찰구가 필요하다. 여기에 수도권 전철 신창 연장을 곁들인 장항선 복선 전철화가 추진되면서 역내 장항선 선로를 다듬어야 했다. 새로운 역사가 지어지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새로운 역사는 지어야겠고, 그런데 돈은 없고. 정녕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1986년부터 2003년까지 있었던 천안역 구 역사. 이 역사가 새로 지은 것인지, 증개축한 것인지는 기록마다 달라서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부풀어가는 민자역사의 꿈

이때 해결사로 등장한 것이 민간 자본이다. 유통회사들은 대규모의 소비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공간이 필요했는데, 철도역만큼 그들 요구에 들어맞는 곳도 없었다. 이 지점에서 철도청과 자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졌고, 민간 회사가 건축 후 30년간 상업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 조건으로 새 역사를 건설하는 대신 정부는 그 대가로 새로운 역사의 소유권을 받기로 한다. 바로 이것이 민자역사다.

1980년대 서울역과 영등포역을 시작으로 수도권 주요 역에서 민자역사를 지은 철도청은 1996년 5월 23일에 민자역사 개발 계획을 밝혔다. 천안역을 포함해 용산, 평택, 동대구, 부산, 부산진, 광주, 노량진, 의정부, 오류동역 등 10곳을 2001년까지 민자역사로 개발하기로 했다. 앞선 사업에서 재미를 본 철도청이 서울뿐만 아니라 수도권과 지방 대도시로 민자역사 사업을 확장한 것이다.

하지만 계획이 발표되고 1년 뒤에는 IMF 금융위기라는 거대한 장벽이 기다리고 있었다. 천안역의 민자역사 첫 시도는 무산되었고, 저 역 중에서 실제로 진행된 곳은 용산, 의정부, 평택뿐이었다. 어쩌면 이때부터 조짐이 안 좋았을지도 모른다.

민자역사가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2003년. IMF 금융위기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경제가 곧바로 회복하면서 개발 열풍이 되살아났고, 새천년과 월드컵이라는 중요한 행사를 잘 마무리했으며, 철도청은 공기업 한국철도공사로 새로 태어났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당시 홈플러스를 운영했던 삼성테스코가 공동 사업자로 나서게 되고, 조감도가 발표되었다. 그 비좁은 구역사가 헐려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때 민자역사에 들어설 시설로 백화점, 대형 할인마트, 멀티플렉스 영화관 등이 내가 사는 동네에 있었으면 좋을 것들이 골고루 언급되면서 별의별 소문이 떠돌아다녔고, 원대한 계획을 들은 사람들의 기대는 커져만 갔다.

 

2003년에 처음 나온 민자역사 조감도. 신한과 삼성테스코가 사업자로 참여했다. ( 클릭하면 관련 기사로 연결.)

 

 

쇠락한 천안역의 터줏대감, 임시역사

문제는 천안에서 천안역의 위상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천안역을 왜 원도심이라고 부르겠는가? 거기가 원래부터 도심이었기 때문에 원도심인 것이다. 역에서 1~2km 떨어진 천안중앙초가 조선시대에는 천안 관아 자리였고, 경부선이 개통할 때만 해도 천안역은 읍성 ‘변두리’였다고 한다.

변두리는 재빠르게 중심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에 충남 서해안을 잇는 장항선, 1980년대에 사라진 안성선이 건설되었는데, 다 천안역에서 만났다. 사람이 모이고 물자가 모이니 자연스레 충청도에서 대전 다음으로 중요한 철도 거점이 되었고, 1990년대까지 천안 제일 번화가는 천안역 앞 명동거리였다. 천안을 전국에서 지명도 있는 도시로 키운 데에는 철도의 공이 컸다.

역설적으로 천안역에 위기가 찾아온 건 천안이 대도시로 성장할 무렵부터다. 40년 전 역 주변에는 도시의 거의 모든 기능이 몰려 있었고, 이것으로 야기되는 인파와 교통 수요를 왕복 2~4차선 도로망으로 감당해야 했다. 도심 혼잡을 해소할 겸 도시 규모도 더 키워야 했기에 천안시는 원도심 기능들을 외곽으로 나누게 된다.

1980년대에 천안터미널을 신부동으로 옮긴 터미널 소유주는 백화점 유치도 모자라 천안 최초 멀티플렉스 영화관, 천안에서 가장 큰 서점도 들인다. 쌍용동에는 거대한 아파트 숲이 생겼고, 그곳에 지은 어떤 대형할인매장은 전국에서 손꼽는 매출액을 벌어들였을 정도로 자리 잡았다.

이때 정부는 대한민국 최초 고속철도인 경부고속선을 건설하면서 천안역 대신 아산 배방읍과 천안 불당동 일대에 새로 지을 ‘신천안역’에 정차시키기로 한다. 토지보상비와 건설비를 절감하는 한편, 역사 주변을 역세권 신도시로 만들어 주택 보급과 수익을 꾀했다. 마침 삼성은 그 근처에 대규모 반도체/디스플레이 공장을 짓기로 계획했고, 급속한 도시 발달로 넓은 업무 공간이 필요했던 천안시청은 2005년에 천안시의회와 함께 불당동으로 이전하게 되었다. 신천안역은 천안과 아산 시민 간 격렬한 싸움 끝에 천안아산역이 되었고, 역세권 신도시는 아산의 급속한 발전과 불당불패 신화를 만들어냈다.

천안역으로부터 도시 핵심 기능을 넘겨받은 신부동과 불당동은 오늘날 천안의 양대 도심으로 성장한 반면, 역전 군데군데에는 빈자리가 생기게 되었다. 시청마저 나간 2000년대에는 주변 상권이 급속도로 몰락해버렸고, 천안시청이 있던 자리에 대규모 민자 유치를 시도했으나 무산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민자역사에 투자하거나 입점할 업체는 찾기 어려웠고, 2008년 금융위기는 전국에 불어 닥친 개발 열풍을 잠재웠다. 삼성테스코가 사업에서 발을 뺀 사이 다른 사업자는 새로운 업체를 찾아 2007년 착공을 계획했으나 착공 시기는 계속 늦어졌고, 착공 허가를 받은 지 4년이 넘도록 공사를 진행하지 않자 천안시는 허가를 취소시켰다. 지루한 소송과 행정 절차 끝에 결국 민자역사는 물거품이 되었다. 이게 임시역사가 만들어지고 난 뒤 10년 동안의 이야기다.

삼성테스코가 나가고, 남성이라는 새로운 업체가 참여한 뒤 2007년 경에 나온 조감도. (클릭하면 관련 기사로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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