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 사람들에게 시내버스를 떠올려보라고 한다면 아마 대부분은 우리가 늘 타고 다니는 '입석형 버스'를 머릿속에 그릴 것이다. 짧은 등받이 달린 의자에 넓찍한 통로, 기다란 세로 봉이 여럿 달려 있는 그런 버스 말이다.
하지만 글쓴이가 어릴 때만하더라도 천안에는 '좌석버스'라는 것이 있었다. 일반 버스와 생김새는 별 차이가 없지만, 탑승하면 등받이가 머리까지 오는 좌석이 한 열에 두 개씩 나란히 있어서 앉아 갈 확률이 높았다. 이 좌석버스라는 것은 주로 농촌이나 타 도시로 가는 장거리 노선에 배치되었는데, 연기 전의와 공주 광정으로 가는 200번대 노선, 동면과 수신 상록리조트로 가는 400번대 노선, 안성으로 가는 700번대 노선 등이 있었다. 출발지는 모두 터미널이었고 배차 간격은 2, 30분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어릴 적 내게 좌석버스는 그림의 떡이었다. 입석형 버스보다 좌석이 좋았기 때문에 고급스럽고 편해보여서 타보고 싶긴 했다. 하지만 사양이 좋은 만큼 가격이 비쌌고, 마침 집 앞에도 안 서다보니 좌석버스를 탈 기회가 거의 없었다.
오늘날 좌석버스를 돌이켜 생각하면 이만한 계륵도 없었다. 승객 관점에서는 일반 시내버스와 같은 차량을 쓰면서 좌석은 뒤로 젖혀지지 않고 정류장도 일일이 서는데 가격은 몇 백 원을 더 받는 악덕한 버스였다. 그래서인지 일반 버스가 미어터져도 좌석버스는 상대적으로 많이 여유로웠고, 내가 탄 경험도 중학교 다닐 때 지각하지 않으려고 마지못해 탄 한 두번이 전부였다. 출근 시간에 콩나물 시루 같았던 일반 버스보다 상대적으로 텅텅 비는 버스를 운행해야 하는 운수사에서는 좌석버스가 영 마뜩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시내버스 대개편이 이뤄진 2007년 12월에 사라졌고, 그 흔적은 201, 402, 500, 710번으로 남았다.
일반 버스만 남은 대개편 이후 10년, 인구가 늘고 시가지는 서부와 북부로 넓어져가면서 구청이라는 것이 두 개나 생겼다. 일반 버스만으로는 대중교통 수요를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2017년 경에 급행 버스가 새롭게 등장했고, 여러 부침 끝에 2023년 7월 현재 도심 순환 버스 '5번'과 천안아산역-천안터미널-병천을 잇는 '492/493번'이 운행하고 있다.
급행 버스 운행 자체는 환영할만한 일이거니와 시민 반응도 좋다. 5번은 기종점과 정류장 조정을 통해 2021년 12월 기준 300명 대에 불과한 일평균 총 이용객수를 2022년에 1,000명 대로 끌어올렸다. 배차 간격이 35분으로 다소 긴 편인데도, 급행 대중교통 수단의 효용성을 느낀 사람들이 입소문을 타고 5번을 이용하게 된 것이다. 493번도 그동안 환승이 필수였거니와 이동 시간이 1시간이 넘었던 동부 6개읍면과 천안아산역을 한번에 잇는다는 점에서 존재 이유가 있다.
그러나 이 좋은 급행 버스가 농촌과 일부 도심 지역에서는 그림의 떡이라는 현실이 매우 아쉽다. 일단 입장과 성거 사람들은 자기 거주지에서 급행 버스를 탈 수조차 없다. 급행 시내교통 수단을 이용하려면 성환역이나 직산역을 가야하는데 그러면 시내버스만으로 이동하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나마 있는 492/493번은 하루 총 운행 횟수가 왕복 8회에 불과해서 일부러 그 시간에 집밖에 나서지 않는 이상 있으나 마나하다. 인지도도 없어서인지 승객수도 적다. 492/493을 차보면 혼자 탈 때도 있었다. 그리고 농촌과 천안터미널, 천안아산역을 빠르게 잇는 데 급급했는지 중간에 설 법한 몇몇 정류장도 그냥 지나치곤 한다.
급행버스를 도입한 시도는 분명 좋았지만, 수요 대비 공급이 한정적이라 급행버스로 이득을 보는 사람은 일부 지역에 국한되어 있어 이용하기가 참 어렵다.
200/201, 400/401번 버스를 자주 타는 사람들은 이런 일을 한번씩 겪었을 것이다. 시내로 나갈 때 성거나 목천 쯤에서 가면(혹은 그 반대의 상황에서도) 자리가 없는 상황 말이다. 목적지인 시내나 집을 가려면 30분이 걸리는 데도. 어쩔 때는 종점 부근에서 자리가 차는 경우가 있다. 이러면은 20~30km에 달하는 장거리를 서서 가야하는 것이다. 타는 사람이 많은데 공급이 이를 못 따라가는 상황은 승객도 곤란하지만, 안전 운전에 신경 써야 하는 기사 입장에서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급행버스의 쾌속성은 살리면서 좌석버스의 편리함을 더한 '좌석급행버스'는 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입석형 버스 대신 머리까지 오는 의자를 뒤로 젖힐 수 있고 승차감을 개선한 40인승 이상 고급 사양 버스로 바꾸고, 자동차전용도로로 경로를 변경하거나 쾌속성을 심하게 해치지 않는 선에서 정류장 몇 곳을 더 세우면 대중교통 편의성은 더욱 좋아질 것이다.
492/493번을 예로 들어보자. 도심 구간에서 '종합터미널 - 천안역 동부광장 - 남산중앙시장 - 천안아산역'에만 정차하는데, 주거 인구가 많거나 유동 인구가 몰릴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에 정차 정류장 몇 곳을 더 세운다. 정류장 추가 정차로 인해 지체되는 시간은 천안대로를 경유함하거나 경유 도로를 직선화해 어느 정도 상쇄한다. 이런 식으로 경기 안성으로 가는 201번과 세종 전의로 가는 710번과 공주 정안으로 가는 701번을 급행버스로 전환하면서 수요가 많은 정류장에만 정차하고 인적이 드문 곳은 국도나 지방도를 경유해 빠르게 다니게 하면 될 것이다.
좌석급행버스는 분명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을 것이고, 성과를 바탕으로 노선을 다른 읍면과 도시에도 확대해볼 수 있다. 특히 세종/청주는 천안과 경계가 맞닿은 도시인데도 도심과 도심을 오가는 직행 시내버스가 없는 실정이다. 청주는 그나마 시외버스라도 30분에 한 대 꼴로 오가지만, 세종은 하루 5회(그마저 우등 버스가 더 많다.)가 전부다. 양 도시에 좌석급행버스를 투입한다면 시민들의 비용이 절감되고 편익은 늘어날 것이다.
좌석급행버스는 수도권과 대도시에서는 이미 급행좌석버스(M버스), 광역버스 등의 이름으로 뻔질나게 다니고 있거니와 최근에는 충청권에도 확산되고 있는데, 대전 버스 B1이 아주 좋은 예다. 대전 버스 B1은 대전역-정부세종청사-청주 오송역 구간을 행정중심복합도시의 주요 간선 대중교통망인 '급행버스급행체계'(BRT, 바로타)를 활용해 운행하고 있다.
개통 전만 해도 적자를 예상하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개통 이후에는 대전에 있는 근무지로 향하는 세종 주민 수요와 세종시에서 가장 가까운 고속열차역인 오송역을 통해 타 지역과 세종을 오가는 사람들 수요가 몰리며 단숨에 콩나물 시루가 되었고, 여기에는 가격 대비 편안한 좌석도 한 몫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현재는 전국 직행좌석버스 노선 승객수 1, 2위를 다투고 있고, 충청권 유일 2층 버스도 다니고 있다. 그 뒤에 청주시는 세종터미널과 청주국제공항을 잇는 노선(B3)을 만든 데 이어 증평 - 청주간 105번 노선과 조치원 - 청주 간 502번 노선 중 일부 버스를 좌석급행버스로 전환했다.
청사진이 아무리 좋아도 상상을 현실화하기에는 여러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잘 안다.
아마 시청과 운수회사에서 가장 걱정하는 부분은 '돈'일테다. 고급좌석형 버스는 입석형 버스보다 많은 비용을 지출해야 한다. 현재 광역버스로 가장 많이 쓰이는 현대 유니버스 엘레강스는 2억 원에 육박하는 데 비해, 현대 슈퍼에어로시티 입석형은 1억 3,658만 원에 불과하다. 현대 유니버스는 45인승이라 차체가 크고 길기 때문에 구입비 못지 않게 유지비도 현재 입석형 버스보다 비쌀 수밖에 없다. 승객들에게 현재 기본요금보다 200, 300원을 더 받아 운행한다면 비용 문제는 어느 정도 상쇄될 것이고, 그만큼 서비스가 좋아지기 때문에 사람들도 기꺼이 추가 요금을 내고 탈 것이다.
좌석급행버스를 천안 시외 지역으로 운행하기 위해서는 지난한 협의 과정이 필요하겠지만 적극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청주와 세종은 충청권 주요도시지만, 천안과 두 도시의 도심을 바로 잇는 시내버스는 단 한 대도 없다. 그나마 청주는 시외버스가 2, 30분 간격으로 다니기라도 하지, 세종은 하루 네다섯 편 밖에 없어 대중교통으로 천안 도심 - 세종 도심 간 이동하려면 여러 번 환승이 필요하다. 두 도시보다 훨씬 먼 서울로 갈 때는 목적지에 따라 시외버스, 수도권전철, 일반열차, 고속열차 등으로 골라 타는 것과 비교하면 정말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천안은 세종시를 중심으로 형성된 행복도시권의 일부에 포함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에서 천안으로 잇는 BRT도 계획되어 있다. 최근에는 여러 지자체가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하고 행정구역을 통합하는 메가시티가 비수도권 지방정부의 생존 전략으로 떠오르기도 했다. 천안-세종/청주 간 좌석급행버스 신설은 대중교통 이용 불편을 줄일 뿐만 아니라 충청권 도시 간 교류를 활성화해서 충청권을 긴밀하게 연결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될 것이다.
좌석급행버스를 도입하면서 시내버스 체계 전반을 효율화할 방안도 필요하다. 일반버스를 그대로 둔 채로 좌석급행버스를 운행한다면 수요 대비 공급이 많아져 자칫 두 버스가 텅텅 비어가는 상황이 나올 수도 있다. 그래서 중복되는 노선은 좌석급행버스로 통합하거나 운행횟수를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특히 493번이 다니는 경로인 '천안터미널 - 천안역 동부광장 - 남산중앙시장 - 남부오거리' 구간에는 버스가 몇 대씩 몰려다닌 상횡이 벌어지는데, 여기를 경유하는 노선들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반대로 일반버스를 좌석급행버스로 전환했을 때 그 버스가 특정 구역을 경유하는 유일한 노선이면 생기는 문제도 있다. 천안 안성 시경계 구간을 다니는 노선은 201번이 유일한데, 201번이 좌석급행버스로 전화해서 그 정류장을 정차하지 않는다면 그곳은 졸지에 대중교통 오지가 된다. 하지만 이를 보조할 노선을 만들어 급행버스 연계가 가능해지면 오지가 될 염려는 줄면서 오히려 효율적으로 운행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은 지난 5월 천안시청 주관으로 열린 '2023 상반기 천안시 정책 아이디어 공모전'에 글쓴이가 제출한 기획안 <도심과 농촌, 도시와 도시를 잇는 '좌석급행버스'>를 재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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