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대 대선 쪽글] 선거 구호 유감

“이제부터 진짜 대한민국” “새롭게 대한민국”
앞 문장을 뒤따르는 “지금은 이재명”, “정정당당 김문수”를 빼먹으면 도대체 이게 어느 당 후보의 구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 양당 후보의 대선 구호는 서로를 퍽 닮았다. 정식 국호를 썼다든지, 진짜나 새롭게 같이 추상적인 단어가 수식하는 꼴이라든지, 국가를 전면에 내세우는 보수적 가치가 담겨 있다는 점이 그렇다.
양 구호를 보면서 식상하다 말고는 아무 느낌이 오질 않았다. 요즘 ‘익숙한 맛’을 찾는 사람들이 제법 보이는데, 그 관점에서 구호 둘을 음식에 빗대자면 공기밥이 떠오른다. 그것도 집에서 갓 지은 밥이 아닌 식당에서 미리 데워놓는 뚜껑 덮인 작은 스테인리스 그릇 공기밥. 익숙하기만 할 뿐 오래 데우다 보니 맛이 별로여서 딱히 그립지도 않은 그 밥.
안 그래도 우리나라 이름이 들어간 선거 구호를 내걸고 당선된 사람만 두 명이나 된다. 특히, “新(신)한국 창조”를 내건 김영삼, “새로운 대한민국”을 내건 노무현의 사례에서 보듯이 새로움과 국호를 연결 지은 조합은 이미 여러 차례 쓰였다. 마침, 그 잘나신 전임 대통령의 국정 목표 구호는 “다시 대한민국! 새로운 국민의 나라”였는데, 다른 의미로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들 뻔한 사람 밑에서 김문수는 경제사회노동위원장과 고용노동부 장관을 맡았다. 도대체 계엄을 일으켰던 장본인과 단절도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한민국을 새롭게 만든다는 걸까?

그렇다고 새로움보다 진짜를 내세운 구호가 딱히 좋아 보이지도 않는다. 서민정당이라는 그동안 자신들이 내세웠던 정체성을 버리고 후보 말마따나 중도 보수 정당론을 따르는 민주당. 국민 통합을 위해서라서 그랬다고 해도 그렇지, 구호에서 민주당이 앞으로는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다. 구호 제안자가 인정한 것처럼 구호에서는 국뽕 느낌도 슬쩍 난다.
정의당 지지자니까 뭐든지 삐뚤어지게 본다고 지적하고 싶다면, “저녁이 있는 삶”이나 “사람이 먼저다”에 견줬을 때도 그런 말씀이 나올 수 있는지 여쭤보고 싶다. 2012년 대선 국면에서 손학규와 문재인이 각각 내건 구호들은 감성을 자극하면서, 과로와 무한경쟁에 지친 사람들을 위로하고, 서민정당 민주당 후보로서의 정체성을 잘 보여준다.
문재인과 경선에서 겨뤘으나 탈락한 손학규는 다시는 유력 대선 후보가 되지 못했고, 문재인은 다음 대선에서 평범한 구호를 내세우고 당선됐다. 그럼에도 2012년에 만든 한 문장은 한 사람의 정치생명 혹은 대통령 임기가 끝난 뒤에도 따라다니고 있고, 특히 저녁이 있는 삶은 지금도 울림을 주면서 성공적인 선거 마케팅 사례로 꼽힌다. 구호를 잘 짓는 게 이만큼 중요하다.

이번 대선이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벌어지는 또 다른 선거라는 사실을 짚어보면 구호들의 의미는 더더욱 미궁에 빠진다. 결과적으로 계엄령과 탄핵은 87년 체제를 뒤엎지 못했다. 민주화를 이끌었으나 어딘가 어설픈 채로 퍽 낡아버린 그 헌법은 내란을 진압해야 한다는 핑계로 바뀌지 않았고, 만에 하나 계엄령이나 개헌이 실제 됐다고 해서 새로운 정부 체제가 수립된 것은 더더욱 아니었으며, 양당은 이전 정부를 계승하며 번갈아 정권을 잡았다. 양당 후보가 박정희와 김대중 묘소를 참배하며 선대 정신을 계승한다고 공히 말하고 다니는 상황에서 이전까지 대한민국이 가짜였다던가, 그전의 대한민국이 낡았다고 한다면 좀 어색해지지 않는가?
이번 양당 후보들은 서로를 가짜 보수, 가짜 진보라고 욕하고 있다. 한 쪽에서는 윤석열과 절연을 하나 마네하며 아직도 싸움하고 있고, 한 쪽은 국민 통합이라는 이유로 반대편 사람을 끌어들이기 바쁘다. 안 그래도 어수선한 분위기에 내란 종식 선거라는 프레임은 이번 대선에서 미래나 정책을 논하는 것이 사소한 꼬투리 잡기처럼 느끼게 한다.
후보들이 지향하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 명확히 드러나지 않는 상황에서 일상과는 붕 뜬 구호를 가만히 지켜 보자니 내 머릿속이 어지러워진다.
[글 속 글 - 아무도 신경쓰지 않지만 누군가는 신경쓰이는 '진보정당은 지금']

선명 진보를 추구하는 소수정당이 죽지도 않고 또 왔다. 오랜만에 보는 그 이름과 함께. 통합진보당과 합당하면서 2011년에 사라진 민주노동당. 그 이름이 정의당의 대선 기간 임시 당명으로 부활했다.
비민주 진보정당 3당(노동 · 녹색 · 정의)과 금속 · 공공운수 · 보건의료를 포함한 민주노총 산별노조 여덟 곳, 진보 시민단체들은 ‘사회대전환 연대회의’를 꾸려 독자 후보를 내기로 하면서, 선거 기간에 당명을 바꾸는 조건으로 정의당 소속 후보로 출마하기로 한다.
약속을 지키는 과정은 진보정당 지지자라면 너무나 익숙한, 치고 박고 싸우는 정파 싸움의 장으로 자연스레 옮겨 갔고, 4차이자 최종 투표에서 딱 1표 차(반대 71:찬성 72)로 민주노동당이 되었다. 참고로 민주노동당의 경쟁명으로는 가자평등으로, 평등사회당, 사회연대당, 퐁당퐁당(?) 등이 있었다.(개인적으로는 평등사회당이 후보 중에서 가장 나아보이기는 하다. 재미로 치면 퐁당퐁당?)
민주노동당은 대한민국 진보정당사에 큰 의미를 지니는 정당명이다. 2004년 총선에서 노무현 탄핵 기각이라는 뒷바람에 힘입어 민주노동당은 원내 의석 10석 확보라는 쾌거를 이루며 대중에게 이름을 제대로 알렸다. 여러 논란에도 불구하고 그때로 돌아가길 바라는 염원이 당명을 부활시켰다고 볼 수밖에 없다.
진보정당이 느끼는 위기감은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것이다. 연대회의라는 이름 아래 각 정파와 정당이 공동 경선과 선거운동을 하는 것은 사상 처음이다. 여기에 친민주당 진보정당(진보 · 기본소득 · 사회민주)은 내란 종식 연대를 강화한다는 이유로 공천을 포기하면서 권영국은 어부지리로 유일한 진보정당 출신 후보가 됐다. (마침 벽보에서도 권영국 후보만 왼쪽에 서 있다.)
이 정도면 진보정당은 이번 대선에 혼신의 영끌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결과가 좋을지는 장담할 수 없다는 점이 지지자를 미치게 한다. 선거운동 시작일에 후보 현수막 하나 걸지 못할 정도로 민주노동당의 재정과 인력 상황은 열악하다. 원외정당인 민주노동당의 후보는 중앙선관위에서 주관하는 초청 후보 대선 토론회 말고는 텔레비전에서 주목받을 수 있는 공간이 없다시피 하다. 압도적 정권 교체라는 명목으로 과반 득표 당선을 벼르는 민주당 지지자들은 완주를 포기하라며 따가운 눈총을 보낸다.
돈이 없어 후원할 수도 없으니 그저 한 표 던지고 마음속으로 비는 것밖에 없다. 어쨌든 진보정당 후보는 권영국이 유일하므로 진보정당 지지자 모두 그에게 투표하고, 이름 기운도 좀 받아서, 3% 득표율을 넘어서리라는 희망 회로를 돌릴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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