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민주당은 의장은 물론 상임위원장도 다 가져갈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그렇다면 14년 전 이맘때에는 무엇을 고민했을까? 다른 것도 아니고 생존이었다. 2007 대선과 2008 총선에서 역대급 참패를 겪은 야권은 그 이후로도 분당과 합당을 반복하며 지지부진했다.
그래서 2010 지선을 맨정신으로 지켜보기가 차마 어려웠다. 또 지겠거니 하고 미리 낙담하며 개표 방송을 지켜보는데... 이게 웬걸? 출구조사는 야권 승리를 점쳤고, 예측은 개표를 통해 현실이 되었다. 야권 지지자들은 들떴고, 어떤 사람들은 ‘세훈아 방 빼’라는 역대급 설레발을 치기에 이르렀다.
야권에서 축제가 한창일 때, 어떤 사람은 초대장은커녕 곤경을 받고 있었다. 한 사람은 마음대로 단일화했다고 소속 정당의 징계를 받았고, 한 사람은 단일화를 안 해서 야권 지지자에게 조리돌림을 당하고 있었다. 나는 축제를 즐기지 못하는 두 사람이 안쓰러웠다. 자세히는 몰랐지만 좋은 사람들 같았고, 그렇게 두 사람에게 눈길이 가서 뉴스를 이것저것 뒤져봤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들을 지지하게 되었다.
그렇게 난 심상정과 노회찬을 따라다니며 지지 정당을 바꿨다. 진보신당에서 갈라진 뒤 통합진보당에 갈 때도, 통합진보당에서 뛰쳐나와 진보정의당을 차릴 때도. 당원인 적은 이런저런 사정으로 단 한 번도 없었지만, 당원 못지않게 확고하게 지지했다.
영원한 동지이자 라이벌인 노회찬과 심상정. 그 둘 중에서 난 노회찬을 더 좋아했다. 아무래도 방송에서 자주 나오다보니 친숙해서 그런 것 같은데, 그 둘이 당권을 놓고 다투던 2015년에도 나는 노회찬을 지지했다.
인지도의 노회찬, 조직력의 심상정. 둘이 붙었다는 소식에 언론도 주목했다. 치열한 경쟁 끝에 결과 심상정이 대표가 되었는데, 아마 조직표를 끌어 모았던 게 승리 비결이 아니었나 싶다. 나로서는 아쉬웠지만, 기꺼이 박수를 보냈다. 누가 대표가 되어도 당연하다고 생각할 만큼 두 사람은 실력과 소신을 두루 갖춘 정치인이었으니까. 그리고 그 둘도 정정당당히 겨룬 승부에서 서로를 향해 찬사를 쏟아냈다.
그 해는 심상정에게 소위 ‘되는 해’였던 것 같다. 그는 이 글 게재한 현재 300만 조회수를 돌파한 순간을 남기게 된다. 국정감사장에서 소리 지르는 일이야 한두 번이 아니라지만, 이 고성이 유독 유명해진 데에는 정쟁을 유발하거나 상대방을 인신공격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노동자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서 했다는 공감대 내지는 통쾌함이 있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일은 한때 잠깐의 일이 아니었다. 그는 그 이후로도 살찐 고양이법을 내세우며 능력주의 신화를 깨부수려 했고, 대선 토론에서는 전장연과 고 김희수 하사 순직 문제를 거론하며 자신이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억울한 사람들에게 돌렸다. 중대재해처벌법, 노란봉투법 통과를 위해 차디찬 국회의사당 바깥에서 농성을 벌이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참 한결같이 소신을 지키고 있다는 생각이 든 동시에 진보정당 지지자로서 그리고 시민으로서 왠지 모르게 든든했다.
이렇게 항상 강철 같고 이길 것만 같았던 그였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뭔가 달랐다. 주민들에게 심판받겠다는 선언에서 느껴지는 것은 결기나 패기가 아니라 씁쓸함이었다. 본인이 몹시 지쳤다는 게 느껴져 안쓰러웠고, 질 걸 뻔히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 무모해 보이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는 왜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직접 묻지는 못했지만, 짐작은 간다.
우선, 주변에 함께 할 사람이 없었다. 진보 정치 선배였던 권영길, 강기갑은 은퇴한 지 초저녁이었다. NL이라 불리던 사람들과 손잡았던 역사는 지우고 싶은 과거가 되었다. 차세대 진보 정치인으로 꼽혔던 노심조, 진보정치 스타 논객 노유진은 이런저런 이유로 뿔뿔이 흩어졌다. 특히 그 두 개의 교집합에 속했던 노회찬의 죽음이 문제였다. 동지가 사라진 뒤로 그는 정의당의 거의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했다. 당내 확고한 일인자라는 위상은 겉보기에는 좋아 보이지만, 사실은 끊임없이 갈등하고 스스로를 갉아 먹는 자리였다.
그렇게 열심히 아등바등 일했으면 미래라도 좋아야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가 처한 상황이 미래를 잡아 먹고 말았다. 4선 중진이 된 뒤로도 그는 국회에서는 흔한 국회의원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정치개혁특별위원장이라는 정치 인생 최대 요직은 양당의 합의라는 이유로 1년인가 하고 그만두어야 했다. 그렇다고 행정가 경력을 쌓기 위해 도지사를 나가자니 의원직 버리고 출마하는 건 의석 한 석이라도 아쉬운 정당 상황에 사치였다. 국회 부의장, 노동부 장관 등등 하마평만 돌은 직책들은 아마 민주당으로 갈아탔더라면 다 얻었을 것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공공연하게 나온 별명 내지는 비판이 심상정의당이었다. 바깥사람들은 물론 당원들도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당대표를 다른 사람으로 뽑아도 영 미덥지 않았고, 선거철만 되면 차세대 스타를 키워야 한다는 조언이 잇따라서 인재 영입을 여럿 시도했지만 신통치 않았다. 그래서 그가 나설 수밖에 없었는데, 그러면 또다시 비판이 되풀이되었다. 결국 언젠가부터는 진짜 나서야 할 순간에 나서지 못했다.
이것은 열성팬으로 승패가 갈리는 요즘 시대 정치에 더 큰 문제였다. 바깥에서는 물어뜯기고, 한줌단에 불과한 진보정당 지지층은 확고하게 밀어주지도 못했다. 그렇게 페미 대모, 심틀러, 윤카를 만든 사람 등등 온갖 오명이 다 붙었다. 2010년 지선과 2012년 대선에서 단일화해 준 과거, 변하지 않는 노동 중심성은 이미지가 나빠지는 것을 바꿀 수 없었다.
그렇게 그는 그 앞에 놓인 여러 한계와 문제를 끝내 이기지 못한 채 낙선하고, 명예롭지 못하게 은퇴했다.
2024년 5월 30일 내일이면 22대 국회가 문을 연다. 민주당은 또다시 180석 괴력을 선보일 예정이라지만, 어차피 대통령은 거부권을 즐겨 쓰는 윤석열이라서 답답한 느낌은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21대 국회와 22대 국회는 도저히 같을 수가 없다고 감히 생각한다. 그것은 조국혁신당이 있어서도, 이준석이 드디어 초선 중진이 되어서도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21대 국회가 22대 국회와 다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본회의장에서 더 이상 심상정을 볼 수 없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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