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의 관점과 전략을 평가받는 비례대표 선거. 참신한 공약을 많이 내놓고, 지역 기반이 미약하지만 광범위한 노동자 지지를 받았던 진보정당에는 그나마 비빌 언덕이었지만, 이번 선거에서는 그마저도 무너졌다. 소선거구 위주 선거제도, 위성정당, 정권 심판론 선거 구도만 탓하기에는 진보정당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유권자가 별로 없었다.
4년 전 총선에서 9.7% 득표율을 얻었던 정의당이 4년 뒤에 2.14% 득표율로 원외로 내쫓길 거라 생각한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노동당은 사회변혁노동자당과의 합당으로 재기를 노렸지만, 득표율이 소수점 두 자릿수(0.09%)로 떨어질 정도로 지지가 너무 미약해져서 지금 이 글에서 구체적으로 분석하기가 난감하다. 진보당은 이렇게 될 걸 예상이라도 한 듯 민주당 위성정당에 들어갔고, 두 석을 얻었다.
숫자만 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언제까지 한숨만 쉴 수는 없다. 그 숫자가 나오기까지는 수많은 이야깃거리가 있고, 그 이야기들을 잘 받아들여서 고쳐나가면 다음 총선에서는 진보당은 자리를 지키고 정의당은 원내로 돌아갈 수 있다. 지금부터는 그 속 이야기를 하나하나씩 뜯어보고자 한다.
이대남과 이대녀, 갈라치기의 함정
이번 선거에서도 이대남은 선거 승패를 가를 변수로 불렸고, 이대녀는 주목을 별로 받지 못했다. 지상파 방송 3사(KBS, MBC, SBS)에 실시한 총선 출구조사에서 드러나듯이 이대남과 이대녀의 지지 정당은 다르기는 하다. 하지만, 작은 차이에만 주목한다면 전체적인 흐름을 놓칠 수 있다. 바로 그 이대남조차 정권 심판론에 손을 들어줬고, 이대남이 여전히 진보정당의 표밭이라는 점이다.
범민주(민주연합 + 녹색정의 + 새미래 + 조국혁신) 지지율과 범보수(국민미래 + 개혁신당)의 득표율은 각각 47.7% 대 48.2%로 팽팽했다. 그마저도 개혁신당은 범보수로 구분 되기는 하지만, 범민주 못지않게 (그리고 때로는 녹색정의당보다 더) 윤석열 정권 심판을 외쳤던 것을 고려하면 전반적으로는 정권 심판론이 우세했다고 볼 수 있다.
녹색정의당 지지율에서 드러나는 2030 남성의 표심은 그동안 보수 진영 관점에서만 이대남이 논해져서 별로 신경을 쓰지 못한 것 같다. 각 집단을 지지율 순으로 나눠보자면 2030 여성이 가장 많은 지지를 보냈고, 2030 남성은 출구조사 예상 득표율(1.8%)에 근접한 비율로 다음으로 많은 지지를 보냈다. (그다음은 4050, 60대 이상 순)
여성주의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심해서 그것에 대한 반대를 투표 이유로 삼는 사람이 제법 많은 계층에서조차 정의당은 적지 않은 지지를 얻고 있다. 2030 남성 중에서도 여성주의의 가치를 인정하고 진보적 의제를 강하게 지지하는 사람이 여전히 많다는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얼마 전까지는 ‘20대 남성’이었다.)
청년은 진보정당의 전통적 지지층이면서, 그들이 성장해 사회 주류가 되어 개혁을 이끄는 중요한 집단이다. 정의당이 국회에서 쫓겨나갈 것을 알고도 계속 지지했던 이들에게는 진보적 의제를 끊임없이 생산함으로써 정당을 계속 지지할 동기를 보여줘야 한다. 정의당을 지지하지 않거나 싫어하는 청년들에게는 청년과 남녀를 두루 아우르는 정책을 만들어내고, 청년 남성에게 만연한 여성주의에 덧 씌워진 오해를 풀어나감으로써 정의당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누군가가 갈라 치는 정치를 통해 청년과 한국 사회를 분절하려고 하고 청년들을 이대남이나 이대녀 같은 희한한 단어로 부를 때, 정의당은 통합의 정치로 사회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이대남과 이대녀를 국어사전에서 없애버리는 정당이 되어야 할 것이다.
곳곳에서 울려대는 사이렌: 호남, 경기도 대도시
이제는 252개 시/군/구 단위 선관위로 집계된 정의당 정당 득표 현황을 바탕으로 진보정당의 현주소를 분석해보려고 한다. 먼저 득표율이 가장 낮은 지역부터 25곳을 줄 세웠는데, 지역주의 양대 축으로 꼽히는 호남과 영남 지역이 대부분이다. 보수의 성지라 불리는 대구경북은 그럭저럭 넘어 가는데, 호남이 왜 이렇게 많을까?
호남이 어떤 동네인가, 진보의 성지라고 불리는 곳 아닌가. 그래서 진보정당들이 꾸준히 당선자를 내고, 진보당도 여기서만큼은 자신 있게 민주당과 정면승부를 시도했다. 그런데 지역구 후보들은 몇 후보를 제외하면 처참히 패했고, 득표율은 이렇게 낮다. 왜일까?
호남 지역 득표율 현황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민주당은 호남에 배정된 지역구 모두를 가져갔지만, 비례대표에서는 조국혁신당에 밀려 2위를 차지했다. 지민비조(지역구는 민주당, 비례대표는 조국혁신당) 바람이 가장 강력하게 분 곳이 바로 호남이다.
대구경북과 호남은 지역주의 투표 성향을 강하게 띄는 지역으로 비판받지만, 그것이 작동하는 방향은 전혀 다르다. 대구경북은 보수 적통을 이어 받은 한 정당에 표를 몰아주는 경향이 강하다면, 호남은 비보수계 정치인 중에서 밀어줄만한 사람이 나타나면 그 정당에 표를 몰아주는 것이 특징이다.
2016년 총선에서 안철수가 새정치 바람을 몰고 호남에 상륙하자 호남 사람들은 국민의당에 비례대표 표뿐만 아니라 지역구도 몰아줬다. 반면 이번 총선에서 김대중 정신을 이야기하며 공공연하게 호남 사람들을 노렸던 새로운미래는 호남에서 지역구를 얻지 못한 것은 물론 득표율에서 개혁신당과 도토리 키재기 싸움을 했다. 그만큼 호남 사람들이 밀어줄 사람, 버릴 사람을 확실히 구분한다는 것이다.
진보정당에는 호남 사람들에게 호소할만한 대선 주자급 인물이 딱히 없는데, 이런 상황에서 호남에 열을 쏟는 것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밖에 안 된다. 오히려 조국혁신당 같은 게 튀어나오면 진보정당은 더 큰 피해를 입는다. 보수정당이 없다고 해서 누워서 떡먹기 식으로 진보정당이 지역 제2당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크나큰 착각이다.
호남과 영남에서 득표율이 낮은 이유는 설명하기 쉽지만, 경기도 대도시에서 득표율이 낮은 건 좀체 납득이 되지 않는다.
보통 도시에서는 진보 성향 유권자가 많고, 경기도 도시들은 서울 팽창으로 인한 인구 유출로 컸기 때문에 서울과 정치적 정서를 공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 요인이 제대로 맞물린다면 경기도 대도시들은 서울과 득표율이 비슷하거나 더 높아야 하는데, 정의당은 2% 벽을 여러 곳에서 넘지 못했다.
이것은 꽤나 심각한 문제인데, 용인/화성은 특례시거나 특례시 지정을 눈 앞에 두고 있고, 성남/남양주/평택/시흥은 인구가 50만 명이 넘은 대도시이며, 하남/양주/광주는 인근 도시 집값 상승으로 급격한 도시화가 진행되는 지역이다. 이런 지역은 지역에 뿌리내린 정치인들이 별로 많지 않아 상대적으로 개척이 쉽다.
진보정당들은 이런 지역에서 조차 발을 뻗지 못하고 있다. 결국 고질적인 진보정당 내부 문제, 즉 허약한 조직력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지점이라 할 수 있다.
우리는 당신을 버리지 않았다: 전통적 지지 기반과 당 정치인의 활약, 서울 그리고 제주
그래도 희망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득표율이 가장 높은 곳부터 등수를 매겨 25위까지 꼽으면 정의당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길이 보인다.
가장 많은 표를 얻은 고양 덕양구는 심상정 지역구가 있는 곳이며, 5% 이상 득표율을 기록한 지역들은 하나같이 정의당의 지역 기반인 곳이다. 윤오 후보가 출마한 서울 도봉구, 김종민 후보가 출마한 서울 은평구, 송상호 후보가 출마한 청주 상당구도 비교적 높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전남 영암이나 경북 안동 같이 그동안 득표율 상위 지역에서 잘 볼 수 없었던 곳도 눈에 띄는데, 다 이유가 있다. 이번 비례대표 후보 명부에서 2순위에 오른 허승규는 2022년 지선에서 녹색당 출신 유일한 시의원이 될 뻔했을 정도로 안동 시민에게 많은 지지를 받았고, 3순위에 오른 이보라미는 현대삼호중공업 노동자 힘으로 영암군의원과 전라남도의원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비례대표 명부에 경쟁력 있는 후보를 공천한 것이 정당 득표율에도 영향을 미친 것이다.
상위 25곳 중에는 서울과 제주에 속한 지역이 두루 분포해 있다. 서울은 마포를 중심으로 은평과 서대문에서 많은 표를 얻었다. 종로/용산과 같은 전통적 도심이나, 서울대가 있는 관악은 별다른 후보가 출마하지 않았음에도 득표율이 높게 나왔다. 이곳들은 좌파적 가치에 동의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살기 때문이라고 짐작할 수 있겠다.
아마 앞에서 했던 것처럼 서울 내에서 득표율 순서대로 색을 칠하면 서울 중심과 서북부 지역의 색깔이 진할 것이다. 그리고 이들 지역은 고양 덕양구와 경계를 맞닿아 있기도 하다. 민주당의 낙동강 벨트처럼 정의당의 경의선 벨트가 치열한 접전을 기대할 수 있는 지역이 되기를 바라본다.
제주는 녹색당과 정의당의 연대 효과를 확인할 수 있는 지역이다. 제주도는 이전부터 4 · 3 항쟁 영향으로 보수정당이 지지를 크게 얻지 못한 지역이면서, 환경 보전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많은 지역이었다. 그들에게 녹색당은 대안적 선택지 중 하나였고, 그래서 이곳에서만큼은 녹색당이 정의당이 대등하게 경쟁하고 표를 갈라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
아마 좀 더 일찍 녹색당과 정의당 간 연대가 진행됐더라면 제주도, 더 나아가 전국에서 더 많은 표를 얻었을 지도 모른다. 제3지대론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떠난 뒤 출범한 녹색정의당은 기후 정치를 선거 중심 의제로 내세웠고, 당의 이념도 비교적 선명해졌기 때문이다.
이번 선거보다 긴 시간 동안 녹색정의당을 알릴 수 있었다면 환경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에게 이목을 더 끌었을 수 있을 것이다. 비록 이번 선거에서는 낙선하기는 했지만, 연대에 대한 필요성을 서로 절실히 공감한 만큼 녹색정의당을 이번 한 번에 그치지 않고 다음 선거에서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젊고 신선하고 개성 강한 정당
진보정당에도 한때 제목과 같은 이미지가 있었다. 민주노동당은 권영길의 언변과 현장 노동자의 강한 조직력, 기존 양당에서 볼 수 없는 참신한 공약으로 원내 3당의 자리에 올랐다. 진보신당이 2008년 총선에서 비례대표 봉쇄조항 3% 벽을 불과 0.06% 넘지 못했을 때는 지못미라는 반응이 많았다. 녹색당은 등장 그 자체만으로 드디어 한국에서 녹색 정치를 볼 수 있겠구나 하는 기대를 줬다.
오늘날 정의당에서 그것을 찾을 수 있을까? 글쎄... 2020년 총선 이후 정의당에는 신선한 스타 정치인이나 뚜렷한 이념, 호소력 있는 선거 전략 그 무엇도 없었다. 정의당을 행한 무관심이나 비호감은 늘어만 갔고, 이번 총선에서 정의당의 원외행을 반겼거나 관심조차 없는 사람이 많았다.
정의당이 여러 갈래로 찢어진 뒤 그나마 선명한 색깔을 유권자에게 보일 수 있었고, 그 색깔을 지지하는 사람이 작게나마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들에게 보답하는 방법은 그 색깔을 잃지 않으면서 사람을 채우고, 유능한 선거 전략을 짜서 하루 빨리 원외정당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 그림에서 보이는 모든 수치들은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정보시스템(http://info.nec.go.kr/)을 참고해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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