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세화 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으로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를 다시 읽으며
글쓴이 홍세화 | 출판사 창비
1995. 3. 25. 초판 발행 | 2006. 11. 7. 개정판 발행 | 375쪽
나는 홍세화 선생을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그에게 덥석 선생이라는 호칭을 붙일 만큼 나는 그에게 크게 배웠다. 어릴 적에 그가 겪고 생각한 것을 책으로나마 접하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와 의식을 넓힐 수 있었다.
그래서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이렇게 일찍 돌아가셔서는 안 되는데 하면서 안타까움을 가장 먼저 느꼈고, 선생 책을 읽으며 느꼈던 생각과 감정도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그런 마음의 빚을 지고 있음에도 거리가 멀고 인연이 없다는 이유로 장례식장에 갈 엄두는 내지 못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다소 비겁하고 옹졸했다. 인연 없이도 가는 게 뭐가 대수라고.
그를 기리는 또 다른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중, 『나는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문득 떠올랐다. 내게 많은 깨달음을 줬던 그 책을 다시 읽는 것만큼 좋은 추억을 떠올리는 방법도 없을 것 같았다.
택시운전사는 중학교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읽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 뒤로 선생께 감명받아 고등학교 2학년 때 “쎄느강은 좌우를 나누고 한강은 남북을 나눈다”를 읽었다. 이 책 읽은 시점을 택시운전사와 달리 정확하게 기억하는 이유는 감상평을 대입용 독서기록장에 기록해 두었기 때문인데, 아쉽게도 이 책을 생활기록부에 기재하지는 않았다. (당시에 나더러 종북좌파라고 트집 잡지 않았던 학교 선생님들이 문득 감사해졌다!) 어쨌든 택시운전사는 약 15년 만에 다시 읽게 되는 것이다.
이 책이 가장 큰 명성을 얻은 것은 아마 똘레랑스라는 개념을 처음 설명했기 때문이 아닐까 싶고, 이 책을 다시 읽기 전 가장 뚜렷하게 기억하는 소재도 똘레랑스였다. 책이 나온 이후 그것은 화두가 되었고,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내가 읽은 개정판은 똘레랑스가 어떤 개념인지를 보론장을 통해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똘레랑스가 우리 사회 그리고 인류에게 필요한 가치라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다시 읽고 나서 똘레랑스보다 더욱 인상 깊은 구절을 발견했다. 67쪽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 절에 처음 등장하는 “나는 다른 사회를 보고 싶어.”라는 문장이었다.
내 청년 시절보다 그의 청년 시절은 훨씬 엄혹했다. 군부 독재와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사람들에게 돌아오는 것은 고문이나 학교 제적뿐이었다. 어찌저찌해서 졸업한 그는 무역회사에 업무를 이유로 해외로 발령 났고, 떠나는 길에 죄의식을 느낀 그는 친구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그런데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가 출국한 뒤로 한동안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그래서 이 문장은 동료에 대한 부채감을 상징하면서, 그만큼 억압적이었던 사회에서 살다 자유와 평등, 박애가 넘치는 세상으로 오게 된 그의 처지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편 이 문장은 내게도 의미가 있는 문장이다. 세상이 뭔가 단단히 잘못 돌아가고 있다고 느꼈던 것은 중학교 입학 전부터였다. 문제는 그 앎이 막연했다는 것이다. 원인과 결과, 해결책 등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것을 알고 싶어서 날마다 뉴스를 보고, 여러 책을 읽었다.
그럴 때 이 책을 발견한 것은 지도 없는 채로 보물찾기하던 중에 보물을 건진 셈이었다. 이 책을 읽으며 다른 나라는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우리 사회는 무엇이 문제고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가 있었다. 그가 추구했던 한 사회와 다른 사회의 만남은 내가 이 책을 집게 된 이유가 되었다.
이런 다른 사회와의 만남이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개인만 놓고 보면 참 박복하기 그지없는 상황이다. 수모는 피했더라도, 어쨌든 이방인으로서 오랫동안 살아야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갈 때는 내 맘대로 지만, 올 때는 아니’었던 것이 문제였다. “꼬레를 제외한 모든 나라에” 갈 수 있는 망명자였고, 고국 눈치를 많이 봤던 프랑스 한인 사회와 가까워질 수도 없었다. 그래서 그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심야 임차 택시운전사였다.
택시 운전이 힘든 것은 프랑스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임차 택시는 우리의 사납금 택시와 모양새가 닮았다. 그는 돈 없는 망명자였기 때문에 이민자들만 주로 한다는 임차 택시 운전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들은 대우가 가장 좋은 개인택시를 꿈꿨다. 더욱이 그는 할증이 붙고 대중교통이 멈춰 서는 심야에 주로 택시 운전을 나갔다. (다만, 저자는 개인택시는 끝내 하지 않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택시운전사로서 삶이 다른 사회와의 만남을 진정으로 느끼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느꼈다. 책에 담긴 느낌은 택시 운전대를 잡지 않고서는 느낄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인종차별주의자나 약자에게 약한 어떤 한국인의 못난 민낯, 베트남 보트피플 운전사와의 연대감, 파리 곳곳에 남은 뜨거운 함성의 현장, 실생활에서 드러나는 프랑스 사람들의 의식(똘레랑스, 평등, 뚜렷한 자기 개성) 등등
책이 출간된 지 30년을 바라보는 지금에도 책이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프랑스 사회를 직접 부딪치며 느낀 것 생각했던 것을 풀어냈기 때문이다. 잠깐 스쳐가는 관광객으로서, 혹은 사회를 바라보기만 하는 지식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친구가 “노동 현장은 의식이 아니라 생존”이라고 했던 말의 진의를 깨닫고, 프랑스 사회의 여러 모습을 살펴볼 수 있었다. 글쓴이도 이 결정을 결코 후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인류의 진보를 꿈꿨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았다. 똘레랑스라는 강력한 방파제가 있는 한 변방에 머무를 것 같았던 그 당시 국민전선, 지금의 국민연합은 노선 온건화와 극우 대중영합주의 팽창의 영향으로 마크롱에 맞서는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했다. 그가 몹시도 버거워했고 나도 버거운 한국의 물신주의는 오히려 강고해지는 것만 같다.
그가 생각했던 이상이 현실에서 엇나갈 때가 많았지만, 그는 척탄병으로 사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한국으로 귀국한 뒤에도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목소리 높여 제시하고, 투쟁 현장에서 함께 싸우고, 소수자를 위해 일하고, 작더라도 자기 뜻에 맞는 정당에서 활동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노력 덕택에 이상 사회는 끝내 보지 못했어도, 어떤 후손이 그 꿈을 이어받게 되었으며, 그리고 그 어떤 후손은 또 다른 후손에게 그 꿈을 물려줄 것이다.
그런 그가 이렇게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당신이 꿈꿨고 내가 꾸고 있는 사회로 가는 길잡이 같은 책이 이렇게 남아 있어 그나마 다행이다. 그리고 이렇게 길을 알려줬으니 이 책을 읽는 우리는 그 길을 더디더라도 뒤돌아보지 않고 가야 할 것이다. 그것이 고인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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