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정당: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를 읽고
글쓴이 프랜시스 매컬 로젠블루스, 이언 샤피로 | 옮긴이 노시내 | 출판사 후마니타스
2022. 09. 19. 초판 발행 | 364쪽
요즘만큼 세계 정치에서 기성 정당이 신뢰받지 못하는 때도 없다. 대중영합주의에 기승한 극우 정당이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받고, 소수자 혐오와 자국중심주의를 무기로 집권한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은 견제와 균형이라는 근대 민주주의의 주요 원리를 무너뜨리는데 주저함이 없다. 전세계적으로 넘실대는 극우화, 권위주의적 통치자 열풍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책임 정당: 민주주의로부터 민주주의 구하기』라는 책은 ‘약해진 정당’이 문제라고 진단한다.
책에서 가장 길게 언급되는 사례는 세계 경찰이자 민주주의 선진국이라 불리는 (곳이자 저자들이 살고 있는) 미국이다. 미국은 건국 이래 공화와 민주 양당 외에 정권을 잡은 정당이 없다. 전형적인 양당제 국가에서 양당은 당연히 정치에 견고하게 뿌리내린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렇게 거대해 보이는 것과 달리 실제 양당의 힘은 약하다. 애초에 미국 헌법은 민주주의에 대한 불신을 바탕으로 뿌리내렸다. 연방제나 엄격한 삼권분립, 양원제 등 복잡다단한 정치 구조가 그 유산이다. 이에 따라 권력은 분권화되어 있고, 한쪽이 정권을 잡아도 손에 잡히는 권한은 생각보다 작다.
또한 미국 정당 지도부는 의회 내에서만 제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한다. 상원과 하원 각각에서 정당을 대표하는 원내 대표만 있을 뿐, 양원 전체와 원외를 두루 아우르는 대표는 없다. 정당이 가진 강력한 권한이라고 할 수 있는 공천권을 미국에서는 국민 참여 경선 도입을 통해 상향식으로 바꿨고, 지도부는 공천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 지도부가 좋은 평가를 받으려면 정치자금을 많이 끌어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렇게 약하고 작은 정당 체제가 오랜 시간 지속된 결과 오늘날 미국 정치는 망가질 대로 망가진 모습을 국제 사회에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라는 전혀 공화주의적이지 않은 정치인 하나 제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공화당이나 뚜렷한 인물이나 정책적 대안 없이 정체성 정치에 경도된 민주당, 그리고 자기가 지지하는 정당을 결사옹위하다 못해 무력으로 국회 의사당을 장악하려던 극단적 정치 팬덤, 그로 인해 나라가 분열된 미국의 모습을 우리는 생생히 보고 있다. 약한 정당이 민주주의를 위협한다는 저자의 진단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
저자들은 양당제를 통해 이익집단의 이익이 과대 대표될 가능성을 줄이고, 국가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정부 정책을 추진하며, 소수자의 권익이 보장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견고한 양당은 다양한 사회의 갈등을 포섭하고, 갈등의 해결책을 중도적으로 제시하리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그렇다. 이 책에서는 우리나라에서 정치 개혁 의제이자 민주주의 활성화 방법으로 떠오른 풀뿌리 민주주의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악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국민 참여 경선, 일반 당원 권한 강화, 개방 명부 비례대표제, 국민발안/소환/투표 등도 비슷한 이유로 비판한다. 저자들은 국민 참여를 유도하는 정책, 즉 분권화가 정당 정치만 침식시킨 채 민주주의를 훼손한다고 주장한다. 풀뿌리 민주주의가 민주주의를 공고히 한다는 학계의 믿음, 정당은 나쁘고 직접 민주주의가 좋은 것이라는 사람들의 상식을 뒤집는 발언이다.
그렇다면 저자가 생각하는 현대 민주주의의 위기를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가? 바로 영국에 있다. 의원내각제와 강력한 양당, 단순다수대표제가 가미된 웨스트민스터 체제 말이다. 영국은 대의제 민주주의와 책임 정치의 원리를 오랜 시간 발전시켜왔다. 여당 당수는 총리로서, 의원은 각료로서 국정 운영을 책임진다. 제1 야당을 이끄는 당수는 의원들과 함께 여당을 견제한다. 선거철이 되면 지도부는 총선 공천을 진두지휘하고, 선거 결과에 따라 당수를 유지하거나 물러나며, 지도부는 의원 간 치열한 토론 끝에 선출한다.
이런 과정을 반복한 결과 보수당과 노동당이 번갈아 집권했고, 양당은 점진적으로 개혁하면서 정치 안정을 꾀했다. 그 결과 오늘날에도 선진국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한때 브렉시트라는 정치적 논란을 겪기는 했지만, 세계를 휩쓸고 있는 극우화나 대중영합주의 열풍에도 다소 빗겨나가 있기는 하다.
분명 학문적 관점에서는 타당한 결론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사회 변화상을 두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이 제시한 대안이 타당한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개인 개성과 다양성을 존중하는 현대 사회에서 개인주의 강화로 인한 집단 결속력 약화는 세계 어느 집단이나 빚는 현상이다. 또한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의 발달로 사람들은 정보와 생각을 실시간으로 주고받을 수 있고, 의사 표현도 자유롭다. 개개인이 받아들일 수 있는 정보의 양이나 행동력이 더욱 강력해져서 정치, 사회, 경제, 문화 등 여러 부문에 개인이나 불특정 다수가 좋든 나쁘든 영향력을 미치는 강도가 점점 강력해지고 있다. 새로운 정치 세력의 출현과 민중의 직접적 정치 참여를 누그러뜨리는 것이 쉬운 건지 의문이고, 책에서 이렇다할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이 책을 추천하는 이유는 정당 정치, 대의제 민주주의가 약화되면 어떤 현상이 빚어지는지를 잘 설명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정당 권력 약화와 여론 분열은 이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꼽히던 독일이나 북유럽에서도 조금씩 모습을 보이고 있고, 중남미와 동유럽 같이 민주주의가 덜 발달한 곳에서는 권위주의적 통치자들이 정권을 장악한다.
그 미국식 정치 체제를 이식받은 한국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한국 정치 또한 양당제 국가로서 보수계 정당 계보를 국민의힘이 민주당계 정당 계보를 더불어민주당이 이어받고 있다. 천만 당원 시대를 자랑할 정도로 세력은 미국보다 강하지만, 정치권에서 정당의 역할은 미약하다. 독재정권 시기 독재자들은 정당을 불신했고, 야당은 보스가 전권을 쥔 채 보스 결단에 따라 창당과 합당을 반복했다.
민주화 이후에도 정당은 여전히 뿌리내리지 못하고 있다. 국민은 다양한 정치 집단 중 정당과 국회를 항상 불신해 왔다. 정치권은 이런 여론에 호응해 중앙당 축소와 지구당 폐지와 같은 원내 정당화, 여론조사 경선제와 당대표 선거 일반 국민 투표제 같이 당내 정치에서 일반 국민 참여를 늘렸다. 정치 개혁을 이유로 말이다.
그 결과 정치 경험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엉겁결에 대통령이 되고, 공천권은 투명한 기준 없이 보스가 마구 휘두르고, 정치인들은 열성팬에 의지하며, 양당의 정치적 이념 차이가 결코 크지 않음에도 여론이 양극화되었다. 어딘지 지금 미국의 모습이 상당히 겹쳐 보인다.
정치에 별 관심이 없는 사람이 읽기는 다소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정치의 계절이 다시 다가온 요즘 이 책을 읽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세계 정치는 왜 혼란스러운지, 정치가 왜 국민에게 절망을 안겨주는지에 궁금했다면, 꼭 읽어 보시길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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