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흔해 빠진 ‘님’에 대해 유감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으로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모르거나 까먹은 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사람은 없는 한용운의 《님의 침묵》. 아름다우면서도 호소력 짙은 문체에 일제강점기 대표 저항 시인 한용운의 대표작이라는 역사적 의의까지 있다. 그래서 중고등학교에서 주입식으로 여러 번 배운 뒤로도 독립운동과 민족정신을 이야기할 때나 좋아하는 시를 암송할 때 다시금 등장하기도 해서 잊을 수가 없다.
이 시에서 화자이자 중심 주제는 단연 ‘님’이다. 시는 오로지 님을 보고 이야기하는 데 반해, 님은 다양하게 해석된다. 시만 놓고 보면 사랑하는 임을 말하는 것 같지만, 작가가 스님인 걸 고려하면 님은 절대적 진리 혹은 절대자로 볼 수도 있다. 시대적 상황을 놓고 보면 조국 혹은 조국 독립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 특히 국어 교사나 학원 강사들은 이 해석을 염두에 두고 가르친다.
이렇게 님이 다양하게 해석되지만, 님이 절대적으로 소중하고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존재를 지칭하는 말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그래서 중고등학교 때 나는 님이라는 단어의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져서 함부로 쓸 수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사회를 나와보니 님은 거리에 지천했다. 선배님, 선생님, 사장님, 부장님과 같이 윗사람을 향해 붙이는 님은 예사였다. 최근에는 일상생활에서 거리가 먼 사람을 ○○님으로 부르는 것이 보편적이고, 님이 붙을 줄 몰랐던 호칭들에 붙는 것(이를테면 후배님)도 자연스러워졌다. 인터넷에서는 상대방을 님이라고 추어올리면서 할 말 못 할 말을 쏟아낸다.
모임이나 직장같이 친한 듯 친하지 않은 사람과 어울릴 때 나를 (드)파랑 님으로 부르는 건 어물쩍 넘어가도, 나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서 님이라 불릴 때는 황당하기도 했다. 특히, 물건을 사거나 서비스를 구매할 때 상대방이 내 이름을 몰라서 사장님이나 선생님으로 부르면 그것만큼 안 어울리는 것도 없었다. 나는 사장도 아니요, 교원 자격증이 있는 것도 아니요, 나이가 어지간히 든 사람도 아니었으니까. 인턴으로 근무한 회사에서 내가 나보다 직급이 높은 사원에게 주임님이라 높여 불림 당했을 때는 괜스레 정규직 취업 못 한 내 현실을 비춰보며 오히려 그 직원과 회사가 어색해졌다.
그러나 여기저기 쓰이는 현실에 어느 순간 순응해 버렸는지, 어쩌다가 고객과 통화를 할 때 나도 모르게 상대방을 ‘선생님’ 혹은 ‘고객님’이라고 하고 있었다. 때로는 어떤 모임에서 상대방을 지칭할 때 ○○씨라고 부르다가 다급히 ○○님이라 바로 잡기도 했다. 씨도 충분히 다른 사람을 높이는 표현임에도 혹시 결례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하면서 순간 자기 검열을 하고 있었다.
님이라는 표현이 이렇게까지 흔해진 배경을 설명하려면 참 복잡하다.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존비어 체계, 즉 존대와 하대가 너무 뚜렷하다는 점이다. 나와 상대의 위치에 따라 내가 극진한 높임을 받는 상황부터 일방적인 낮춤을 당하는 상황까지 여러 단계가 있고, 그때마다 어휘나 문법이 달라진다. 이런 체계는 한국어를 배우는 외국인들이 가장 독특하고 적응하기 어려운 요소로 꼽힐 정도로 전 세계 어떤 언어와 비교해도 유별나다. 한국어 원어민 중에 존댓말을 제대로 쓰는 사람을 찾기 드문데, 외국인들은 오죽할까.
이것은 2인칭, 즉 상대방을 부를 단어가 마땅치 않다는 점으로 이어진다. 너, 자네, 당신, 그대 등등 보편적으로 쓰이는 2인칭 대명사들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위아래가 확연히 구분되며, 단어가 잘못 쓰이면 심한 반발을 부른다. 동무나 동지는 그런 점에서 괜찮은 대안이 될 수 있지만, 그 북쪽에….
여기에 문화 충돌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는 식민 통치로 근대를 시작했고. 해방 뒤에는 분단과 독재를 오랫동안 겪었다. 긴 시간 권위주의와 군사주의 문화를 몸소 체득 당한 덕택에 우리는 하루 차이로 형 동생을 가를 정도로 인간관계를 맺는 구조가 상당히 수직적이다.
이런 상황에서 광장 가서야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민주주의가 일상에 파고들고 있다. 정치적 민주화 못지않게 사회 문화적으로도 민주주의 의식이 확산한 최근에서야 나이 서열, 갑질, 꼰대 문화에 대한 비판이 나올 수가 있었다. 이에 따라 학교, 직장 등 여러 조직에서 수평적 인간관계 만들기와 상호 존중하는 문화를 만들려는 시도가 생기고 있다. 몇몇 직장에서는 수직적 문화 타파를 이유로 서로를 ○○님이라고 부른다고 하는 것도 들었다.
고 들었는데 이런 맥락이 뭣이 중요한가. 하여튼 우리는 별다른 의식 없이 님을 널리 쓰는 것을. 그것보다 내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문화가 어색하면서 불편하기만 하다는 점이다.
내가 님이라는 표현을 쓰고 들으면서 종종 드는 느낌 중 하나는 이것이 소통과 교류를 가로막는다는 것이다. 사람을 처음 만나면 어색하니까 대화할 때 상대방과 거리를 두고 존중하는 말투를 쓸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단계를 넘어서 사람과 친해지려면 또는 많은 소통을 통해 의견을 내야 할 때는 많은 그리고 물 흐르는 듯한 대화가 필요한데, 이미 충분히 경칭인 ‘씨’보다 한 단계 더 높여 부르는 님은 이런 상황을 어렵게 한다.
히딩크가 위계질서를 깨뜨리고자 선후배 모두 반말을 하라고 지시했을 때, 이천수가 어떻게든 감독 눈에 들고 싶어서 했다던 ‘명보야 밥 먹자!’는 그때나 지금이나 웃음거리로 회자되고 있고, 동서 문화 차이를 상징하는 사례가 되었다. 그런데 히딩크가 한국 문화에 너무나 빠삭해서 선후배 모두를 ○○님이라 부르고, 공손한 어체로 대화를 주고받으라고 지시했다 치자. 밥 먹을 때는 그럭저럭 쓴다 쳐도, 순간의 터치가 골로 연결되는 경기에서 그러는 건 답답하다. 그러다가 소통 속도가 느려서 골이라도 먹히면 웃음은 둘째 치고 복장이 터진다.
극존칭은 포장한 것에 한 겹 더 덧대는 포장과 같다. 극존칭을 쓰는 이상 말의 형식이나 예의에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다. 이러다 보면 말의 내용보다는 겉치레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소통하려고 대화하다가 오히려 말문이 막혀버리고, 사람끼리 관계를 맺는 데 있어 거리감은 좁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내 생각에 님의 남용은 불편한 진실도 함께 담겨 있다. 우리 사회에 평등 의식이 아직 덜 스며들었다는 것이다. 서양에서는 상대방을 부를 때 이름만 부르거나 이름에 Mr. Ms. 같은 걸 붙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것은 단지 그들이 예의를 몰라서 그런 게 아니다. 우리보다 민주주의가 더욱 깊숙하게 일상에 스며들어서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는 의식이 짙게 깔려있기 때문에 애써 경칭을 갖다 붙이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분명 존중받아야 할 가치가 있는 존재이기는 하다. 그런데 그걸 일상생활에서 꼭 님이라는 호칭을 붙여가면서 존중을 드러내야 하는 걸까? 오히려 그렇게 님이 널리 쓰임으로써 님의 가치는 가치대로 떨어지면서, 아직 우리 사회가 인간관계에서 수직적이고 서열을 중시한다는 씁쓸한 이면만 드러내는 것 같다.
‘님’이라는 호칭은 언제쯤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 갈 길이 멀어 보이지만 언젠가는 제자리를 찾았으면 좋겠다. 내가 정말 소중히 아낄 내 임을 위해, 그리고 더욱 진실한 소통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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